아세아방송 정사 (2009년 6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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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세아방송 정사(亞細亞放送 正史)




<돌북가족>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6월 30일)은 아세아방송 창립 36주년 기념일입니다.

아세아방송은 지금은 극동방송의 한 지방사가 되어 <제주 극동방송>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이 방송은 중국선교에서 큰 역할을 한 것이 중국의 개방과 동시에 밝혀졌습니다.

이 방송은 지금도 중국선교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 잘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 방송은 북한선교에서도 큰 역할을 하고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극동방송은 1956년에 개국하였고 아세아방송은 그보다 17년 늦은 1973년에 문을 열었습니다.

극동방송은 처음에는 인천에 송신소와 연주소가 다 있었는데 1960년대에 서울 마포구로 연주소를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고 아세아방송은 제주도에 송신소를 두고 있습니다.


아세아방송이 개국했을 때 많은 혼선이 빚어졌습니다. 두 방송의 성격이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선교방송, 더구나 북방을 주요대상지역으로 하는 선교방송이었고, 외국 선교기관이 설립했고, 이름의 의미도 비슷했습니다.

영문약칭도 아세아방송은 FEBC, 극동방송은 FBS로 비슷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아세아방송을 설립한 기관은 미국의 Far East Broadcasting Company인데 이것을 직역하면 극동방송이기 때문에 더욱 그랬습니다.

“극동방송이 이름을 바꿨나?” ”극동방송이 제주도로 이사했나?“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극동방송을 설립한 미국 복음주의동맹선교회(TEAM)은 1970년대 중반부터 극동방송의 운영권을 다른 기관에 이양하려고 했습니다.

피선교기관이 자립을 하면 선교사나 선교기관은 손을 뗀다는 선교원칙, 극동방송으로 인한 부채, 당시 이른바 <구원파 파동>으로 겪은 혼란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1977년 1월 1일에 아세아방송을 설립한 미 FEBC가 극동방송을 <인수>했습니다.

당시 <공동운영>으로 하느냐 <인수>로 하느냐를 가지고 논의를 거친 끝에 공식문서는 <공동운영>으로 했지만 내막은 <인수>였습니다.

법적인 지위는 아세아방송이 <갑>이었고 극동방송이 <을>이었으나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극동방송은 이미 수도권에서 십여 년간 방송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명도(知名度)가 아세아방송보다 높았고 당시는 세입이기는 했지만 독립된 방송공간을 가지고 있어서 여러 면에서 유리했습니다.

결국 실제로는 아세아방송이 극동방송으로 <흡수> 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다가 나중에는 법적으로도 그렇게 되었습니다.


1970년대 후반에 중국이 개방정책을 취하면서 중국 성도들의 편지가 방송사로 오기 시작했습니다.

이 편지들은 대부분 아세아방송의 방송에 대한 반응이었습니다.

아세아방송이 고출력(250kw)에 지향성, 공간파방송이라는 특수설비를 갖추고 있었고 인력면에서 우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대외적으로는 이 편지들이 극동방송에 대한 반응인 것처럼, 또는 애매모호에게 발표되었습니다.

당시 극동방송은 경제자립운동을 벌이고 있어서 홍보를 강화할 필요가 절실했었기 때문입니다.


1996년에 극동방송이 창사 40년을 맞이했을 때  저는「극동방송 40년사」를 썼습니다.

그 때도 여러 가지 정황 때문에 극동방송 중심으로 기록했습니다.

마음에 참 걸리는 일이었습니다.

그 때 저는 “기독교 역사학도의 한 사람으로 언제인가는 아세방송 정사를 기록하겠습니다.”는 양심선언 비슷한 것을 공개적으로 했습니다.


아세아방송을 생각할 때마다 저는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큰 일을 하고 영광은 남에게 돌리고 조용히 사라져간 성자적인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북한선교를 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자세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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